주말에 K씨는 모처럼 가족들과 나들이 계획을 세우고 차를 몰고 A공원으로 향했다. 운전을 하다보니 A공원으로 가는 길이 차도 막히고, 그쪽으로 가면 저녁에 자신이 좋아하는 식당에 가는 것이 불가능 할것 같아 행선지를 B공원으로 바꾸었다.
한참을 가다 행선지가 바뀐것을 눈치챈 아내는 화를 내며 늘 이모양이라고 아이들 앞에서 K씨에 대한 비난을 퍼붓기 시작했고 그것이 싸움으로 번져 결국은 화가나서 공원을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계획의 변경은 있을 수 있는 일인데, K씨의 부인은 왜 그렇게 화를 낸걸까? 그건 바로 행선지를 바꾸는 과정에서 이런이런 이유로 A공원에 가는 것보다는 B공원으로 가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을 K씨가 가족들에게 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가족들을 설득하거나 동의를 구하지 않고 모든 의사 결정을 혼자서 일방적으로 하고, 그걸 관철시키기 위해 남들이 모르게 은글슬적 자신의 계획을 밀어부친 것이다. 물론 K씨가 의도적으로 그렇게 한 건 아니다. 자기도 모르게, 늘 상황이 그렇게 되어버리는 것이다. 심리치료를 받으면서 이런 식으로 일을 처리하는 방법이 회사에서도, 교우관계에서도 나타난다는 것을 서서히 인식하고 있던 터라, 왜 자신이 자기도 모르게 이런식으로 상황을 몰고가는지 너무나 궁금해 졌다.
왜 그럼 K씨는 자신의 생각을 남들에게 말해주지 않는 걸까? K씨가 어렸을때 부모님이 늘 바쁘셔서 K씨는 하루의 대부분을 형과 함께 지냈다. 형은 부모님의 말씀에 따라 동생을 잘 돌보기는 커녕 자신이 원하는 대로 동생을 조종했으며, 동생의 요구를 잘 들어주지 않았다. 늘 형은 말을 바꾸기 일수였고, K가 원하는게 있으면 형은 그것을 볼모로 이용해 K씨가 하기 싫어하는 일을 시켰다. 부모님께 이런 상황을 알리려고도 했으나 형의 보복이 두려워 할 수도 없었다. 이런 상황에 오래 노출되다보니 자신의 생각을 함부로 말해서는 안되고, 자신이 뭔가를 원한다는 것을 남들이 알면 그것을 철저히 좌절시키거나 다른 사람이 원하는 것을 들어줘야 한다는 강한 믿음이 생기게 되었고, 상대가 모르는 사이에 자신이 원하는대로 일을 만들어서남들이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게끔 만들어 버리는 것이 K의 생존 전략이 되어버린 것이다.
“당신 말대로 공원은 다 그렇고 그래요. 내가 B 공원을 A공원보다 싫어해서 그러는게 아니잖아요. 단지 나는 우리가 어디로 가는지를 미리 알고 싶고, 당신 생각이 바뀌었다는 걸 알고싶을 뿐이예요.”라는 부인의 말이 머릿속에 맴돈다. 아내는 나를 통제하려고 했던게 아니라 진심으로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고 싶었던 거구나. 이런 생각이 드니 갑자기 아내에게 너무 미안한 마음이 든다.
K씨 같은 사람들을 수동적 공격성이 있다고 얘기한다. 자신이 원하는 것, 싫어하는 것을 능동적으로 표현하지 못하고 남들 모르게 은근슬쩍 뒤통수를 쳐서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어내는 것이다. 남들로부터 억압받고 공격을 당했지만 자신은 감히 상대방에 대한 분노를 표현할 수도, 공격을 할 수 없었던 무력감이 낳은 결과이다. 나는 결백한데 남들로부터 오해를 잘 사고 내 주장을 확실히 펴는데 어려움이 있다면 한번쯤 생각해보자. 혹시 나에게도 수동적 공격성이 있지는 않은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