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씨는 매사에 의욕이 없다. 뭘 해도 신나지 않고 그렇다고 딱히 불행한것도 아니다. 그냥 모든것이 그저 그렇고 감정기복도 심하지 않고 하루하루를 심심하게 살아간다. 주변에서 누가 누구를 열렬하게 사랑 한다거나 어떤 일을 신이 나서 하는 사람들을 보면 어떻게그럴수 있을까 신기하기도 하고 그런 생생한 감정들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 부럽기도 하지만 막상 자신이 그런 생생한 감정들을 느낀다면 그것을 감당할 수 없을 거라는 막연한 두려움도 든다.
R씨의 아동기에 뭔가 충격적인 일이 있었던 걸까? 그래서 그런 상처들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려고 감정을 차단하는 것일까? 아니다.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난 R씨는 부모의 관심을 충분히 받고 자랐으며 이렇다할 충격적인 사건 혹은 힘든시기를 보낸적이 없었다. 모범생이었던 R은 좋은 대학을 나와 만족스럽지는 않지만 안정적인 직장에도 다니고 있다.
그럼 도대체 무엇이 R씨를 이처럼 감정을 느낄 수 없는 사람으로 만들었을까? 아들을 너무나 사랑했던 어머니는 모든 일을 아들을 위해서 해주려고 했다. 아들이 시행착오를 해서 좌절할까봐 항상 어머니가 아들을 위한 최선의 방법을 찾아놓았기 때문에 R씨가 할 일이라고는 그냥 어머니의 결정에 따르는 것 밖에는 없었다. 물론 때로는 어머니가 원하는 것과 자신이 원하는 것이 다를때도 있었지만 자신이 선택을 하면 그 선택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이 두려웠고, 어머니가 결정한 일이 잘못되면 어머니 탓을 하면 되므로어머니 결정을 따르는 것이 여러모로 편리했던 것이다.
항상 이렇게 수동적으로 어머니가 시키는 대로만 살다보니 자신의 삶인데도 자신이 자신의 주인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이런 이슈들을 치료에서 다루던 중 R씨는 자신이 손과 발이 묶인 흑인 노예가 되어 사람들에게 전시가 되어있는 꿈을 꾸었다. “편안하고 갈등없는 삶을 살기위해 나는 아마 어머니의 노예가 되어버렸나봐요. “ 그렇다. R씨는 편안한 삶과 자신의 자율성을 맞바꾼 것이다. 겉으로 보이는 R씨의 편안한 삶 이면에는 내것이 아니기 때문에, 내가 책임져야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어떤 것도 큰 의미가 없었던 것이다.
치료를 통해 자신의 무기력이 만성우울증으로 인한것을 알게되자 R씨는 한참을 울었다. 뭔가 자신의 상태를 설명해 줄 수 있는 단어가 있다는 것 만으로도 자신의 상태를, 삶을 이해받았다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제 R씨는 자신이 감정이 없는 사람이 아니라 생생한 감정을 느끼는 것이 두려워 애써 억압을 해왔다는 것을 알아가는 과정에 있다. 많은 사람들이 무기력을 호소하고 있다. 매사에 의욕이 없고 뭘해도 즐겁지가 않고, 무엇보다 생생한 감정의 변화를 느끼지 못한다면 혹시 만성우울증을 앓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의심해 볼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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